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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보는 심원사 역사

보진재 노사신(盧思愼 1427-1498)
선생의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권28
경상도(慶尙道) 성주목(星州牧)

불우조

尋源寺는 伽倻山南에 있다. 이숭인의“奇深源長老”시가 있다. 이병연 선생의『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성주편

深源寺條

深源寺伽倻山在南 有李崇仁詩
심원사는 가야산 남쪽에 있다. 이숭인의 시가 있다.

독곡 성석린(成石璘 1338-1423)
선생의 『독곡집』下권

到深源 前路水石稍淸潔。
下馬少憩 各呑紅柿一顆 酒半杯。
심원암(深源菴)에 당도하니 여기서부터는 수석(水石)이 조금씩 맑아 보였다.
말에서 내려 조금 쉬면서 각기 홍시 한 개와 술 반 잔을 먹었다.
…중략…
昨於深源 以無僧不入 今又見此。
豈非年歲之歉 賦役之煩 山僧亦不支焉 使之處處空其居乎。
山僧如此 村氓可知。
不知窮村處處有其室而無其居者 亦復幾何哉。
엊그제 심원암(深源菴)에서도 중이 없어 들어가지 않았는데 지금 또 그 경우를 만났으니,
이 어찌 흉년이 들고 부역이 많아 산속의 중도 삶을 지탱해 내지 못하여 곳곳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산속의 중도 이와 같으니 마을 백성들의 사정을 알 만하다.
곤궁한 마을은 집만 덩그렇고 사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중략…
歷深源 古寺廢毀殆盡
昔累經宿 亦足興嘆。
抵門外路下馬 披草樹以行 俄而迷失道 彷徨久之。
偶得乞禾僧 令作鄕導
심원사(深源寺)를 지나가는데 오래된 절이라 거의 허물어지고 중이 없는 상태였다.
과거에 내가 여러 번 잠을 잤던 곳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절간의 문 밖에 이르러 말 위에서 내려 잡초와 나무를 헤치며 얼마쯤 가다가 길을 잃고 한참 동안 방황하였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벼를 동냥하는 중을 만나 그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월담 여효사(呂孝思 1612-1671)
선생의『月潭集』권1

海松子田 在倻山南自 東佛庵至尋源寺 幾十餘里。
잣나무 밭이 가야산 남쪽, 동불암에서 심원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10여리에 걸쳐있었다.
萬曆癸巳春 湖南義兵失火延燒 尋源一帶殆無遺種。
만역 계사년(1593년) 봄에 호남의 의병들이 실화하여 심원사 일대까지 불타는 바람에 거의 씨도
남지 않았다.

日曜庵 高麗末 護軍宋千祐 爲都吉逢如壻。
일요암 고려말의 호군 송천우가 도길봉의 사위가 되었다.
吉逢卽姦臣吉敷之弟也。吉敷被誅千佑坐當死。
길봉은 바로 간신 길부의 아우이다. 길부가 주살 당하자 천우도 연좌되어 죽게 되었다.
及巡軍逮捕也馳入尋源寺
이에 순군이 천우를 체포하려하자 심원사로 달려 들어갔다.
巡軍追趕不及而免遂祝髮創此菴
순군이 추격하다가 다행히 이르지 못하여 죽음을 면하였고, 감사하며 머리를 깎고 이 암자를
창건하였다.
蓋高麗尊尙釋氏雖罪犯大辟者走入沙門內則不得拿去云
대개 고려는 부처를 높이 받들었으므로 비록 사형수라 하더라도 절안으로 도망가면 잡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嘉靖年間 僧智遠重修 極其宏敞火干壬辰 後復重創
가정년간에 지원스님이 지극히 광대하게 중창하였으나, 임진년간에 불이났다.
나중에 다시 중창하였다.